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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원본) / 삼조선(三朝鮮) 분립시대 - 제1장 "삼조선(三朝鮮) 총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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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원본) / 삼조선(三朝鮮) 분립시대 - 제1장 "삼조선(三朝鮮) 총론"

키스세븐지식 2023. 4. 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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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원본)

삼조선(三朝鮮) 분립시대 - 제1장 "삼조선(三朝鮮) 총론"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책 조선상고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총 12권)

그러나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 중요 부분에 형광색을 하여 요약 파악에 쉽도록 도움이 첨부된 포스팅입니다. 

(참고: 《조선상고사》(저자 신채호)는 저작권 만료로 현재 CC0이 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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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원본) / 삼조선(三朝鮮) 분립시대 - 제1장 "삼조선(三朝鮮) 총론"

 

 

삼조선(三朝鮮)이란 명칭의 유래

 

종래의 각 역사책에 삼조선 분립의 사실이 빠졌을 뿐 아니라, 삼조선이라는 명사까지도 단군·기자·위만의 세 왕조라고 억지 해석을 하였다.

삼조선은 신·불 ·말 삼한의 분립을 말한 것이니, `신한'은 대왕 ( 大王 ) 이요, 불·말 두 한은 부왕 ( 副王 ) 이다. 삼한이 삼경 ( 三京 ) 에 나뉘어 있어 조선을 통치하였음은 이미 제 1 편에서 말하였거니와, 삼조선은 곧 삼한이 분립한 뒤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신한이 통치하는 곳은 신조선이라 하고, 말한이 통치하는 곳은 말조선이라 하고, 불한이 통치하는 곳은 불조선이라 하였다. 신·말·불 삼한은 이두문으로 진한 ( 辰韓 )·변한 ( 弁韓 ) 이라 기록된 것이고, 신·말 ·불 삼조선은 이두문으로 진 ( 眞 ) · 막 ( 莫 ) · 번 ( 番 ) 삼조선이라 기록된 것이다. 똑같은 신·말·불의 음역 ( 音譯 ) 이 어찌하여 하나는 진·마·변이라 하고 또 하나는 진·막·번이라 하여 같지 아니한가? 이는 남북의 이두문의 용자 ( 用字 ) 가 달랐기 때문이거나 혹은 지나인의 한자 음역이 조선의 이두문의 용자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에는 고전 ( 古典 ) 이 거의 다 없어졌으므로 삼조선의 유래를 찾을 길이 없으나, 지나사 ( 支那史 ) 에는 왕왕 보인다. 사기 ( 史記 ), 조선열전 ( 朝鮮列傳 ) 에 `진번조선 ( 眞番朝鮮 ) '이라 한 것은 신·말 두 조선을 함께 말한 것이고, 주 ( 註 ) 에 “번 ( 番 ) 은 일에 막 ( 莫 ) 으로도 쓴다 ( 畵一作莫 ). ”고 하였는데, 번자를 막자로 대신하면 `진막조선 ( 眞莫朝鮮 ) '이 된다. 진막조선은 신·말 두 조선을 함께 말함이니, `진막번조선 ( 眞莫番朝鮮 ) ' 혹은 그대로 써서 신·말·불 삼조선을 다 말하지 않고, 혹은 막자를 빼어버리고 `진번조선 ( 眞番朝鮮 ) '이라 하거나 혹은 번자를 빼어버리고 `진막조선 ( 眞莫朝鮮 ) '이라 기록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지나인이 외국의 인명·지명 등 명사를 쓸 때에 매양 문예 ( 文藝 ) 의 평순 ( 平順 ) 을 위하여 축자 ( 縮字)를 쓰는 버릇으로 그렇게 쓴 것이다 .

목천자전 ( 穆天子傳 ) 의 한 ( 韓 ) 은 신한을 가리킨 것이요, 관자 ( 管子 ) 의 `발조선 ( 發朝鮮 ) '과 대대례 ( 大戴禮 ) 의 `발식신 ( 發息愼) '은 불조선을 가리킨 것이요, 오직 말조선은 지나와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사기 이외에는 다른 책에 보이는 것이 없다.

 



삼조선(三朝鮮)의 위치와 범위

 

한 ( 韓 ) 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왕이란 뜻이니, 삼한이란 삼조선을 나누어 통치한 세 대왕을 말함이고, 삼조선이란 삼한 곧 세 왕이 나누어 통치한 세 지방임은 물론이어니와, 그 세 도읍의 위치와 강역 ( 疆域 ) 의 범위도 기술할 수 있을까?

삼한의 도읍은 1) 제 1 편에 말한 '아스라' ----지금의 합이빈, 2) '알티' ----지금의 개평현 ( 蓋平縣 ) 동북쪽 안시 ( 安市 ) 옛 터, 3) '펴 라' ----지금의 평양, 이 셋이다. 삼조선이 분립하기 전에는 신한이 온 조선을 통치하는 대왕이 되고, 불·말 두 한이 그 부왕 ( 副王 ) 이었으므로, 신한이 '아스라'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말·불 두 한은 하나는 '펴라'에, 하나는 '알티'에 머무르고, 신한이 '알티' 혹 '펴라'에 머물러 있을 때는 불·말 두 한은 또한 다른 두 서울을 나누어 지키다가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는 삼한이 각기 삼경 ( 三京 ) 의 하나를 차지하고, 조선을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이때의 삼한이 차지한 부분을 상고하건대, 만주원류고 ( 滿洲原流考 )에, “한서지리지에 요동의 번한현 ( 番汗縣 ), 지금의 개평 등지가 변한 ( 弁韓 ) 의 고도 ( 古都 ) 이다.”라 했는데, 번한과 변한이 음이 같으니 개평 동북쪽의 '알티'가 불한의 옛 서울일 것이다.

삼국유사 ( 三國遺史 ) 에, “마한(馬韓 ) 은 평양의 마읍산 ( 馬邑山 ) 으로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마한으로 인하여 마읍산이 이름을 얻은 것이요, 마읍 ( 馬邑 ) 으로 인하여 이름을 얻은 것은 아니나, 마한은 곧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남쪽으로 옮겼음이 사실이니, 평양 곧 '펴라'가 ( 말한 ) 의 옛 서울일 것이요, 신한은 비록 상고할 곳이 없으나 '알티'와 '펴라'의 두 서울이 불·말 두 한을 나누어 점령하였으니, '삼한'이 합이빈 곧 '아스라'에 도읍하였을 것이 의심없다.

이에 삼조선의 강역의 윤곽도 대개 그릴 수 있으니, 지금 봉천성 ( 奉天省 ) 의 서북과 동북 ( 開原 이북, 興京 이동 ) 과 지금 길림 ( 吉林 ) ·흑룡 ( 黑龍 ) 두 성 ( 省 ) 과 지금 연해주 ( 沿海州 ) 의 남쪽 끝은 신조선의 소유이고, 요동반도 ( 遼東半島 : 開原 이남 , 興京 이서 ) 는 불조선의 소유이며, 압록강 이남은 말조선의 소유였다. 그러나 전쟁의 세상에 고정된 강역이 있을 수 없으니, 시세를 따라 삼조선의 국토가 많이 늘었다 줄었다 하였을 것이다.

 

기록상 삼조선(三朝鮮)의 구별 조건

 

이제 역사를 읽는 이들이 귀에 서투른 '신조선' , '불조선' '말조선' 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이미 놀랄 것인데, 하물며 전사 ( 前史 ) 에 아무 구별없이 쓴 '조선 ( 朝鮮 ) '이란 명사들을 가져다 구별하여, 갑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신조선이라 하고, 을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불조선이라 하고 , 병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말조선이라 하면 믿을 사람이 누구랴 ? 그러나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고구려 본기 ( 本紀 ) 에 동·북 두 부여를 구별치 않고 다만 부여라 씌었고신라 본기에는 크고 작은 등 다섯 가야 ( 加耶 ) 를 구별치 않고 다만 가야라 씌어 있으니, 만일 전사 ( 前史 ) 에 구별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여 그대로 구별치 아니하면 두 부여사나 다섯 가야사 ( 加耶史 ) 의 본 면목을 회복할 날이 없을 것이 아닌가? 하물며 삼조선의 분립은 조선 고사에 있어서 유일한 큰 일이니, 이를 구별치 못하면 곧 그 이전에 대단군 왕검의 건국의 결론을 찾지 못할 것이요, 그 이후에 동북 부여와 고구려·신라·백제 등의 문화적 발전 서론 ( 緖論 ) 을 얻지 못할 것이니, 어찌 습견 ( 習見 ) 에 젖은 이의 두뇌에 맞추기 위해 삼조선의 사적 ( 事蹟 ) 을 구별하지 않으랴?

삼조선의 사적 ( 史的 ) 재료는 오직 사기 ( 史記 ), 위략 ( 魏略 ), 삼국지 ( 三國志 ) 등 지나사 ( 支那史 ) 뿐이지만 저 지나사의 저작자들이 그들의 유전적인 교오병 ( 驕傲病 ) 이 있어서, 조선을 서술할 때에 조선 그 자체를 위하여 조선을 계통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오직 자기네와 정치적으로 관계되는 조선을 서술하였고, 그나마도 왕왕 피차의 성패와 시비를 뒤바꾸어 놓았음이 그 하나요, 조선의 나라 이름·지명 등을 기록할 때에 왕왕 조선인이 지은 본디의 명사를 쓰지 않고 자의로 딴 명사를 지어, 동부여 ( 東扶餘 ) 를 불내예 ( 不耐濊) 라 하고, 오열홀 ( 烏列忽 ) 을 요동성 ( 遼東省 ) 이라 하는 따위의 필법 ( 筆法 ) 이 많음이 그 둘이요, 조선은 특수한 문화가 발달하여 왔는데, 매양 기자 ( 箕子 ) 나 진 ( 奏 ) 나라 유민에게 공을 돌리려 하여 허다한 거짓 증거를 가짐이 그 셋이다. 그러므로 사마천이 사기를 지을 때에 연 ( 燕 ) 의 멸망이 오래지 않았으니 연과 삼조선에 관계된 사실의 상고할 만한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한무제 ( 漢武帝 ) 가 조선의 일부분이요, 삼경 ( 三京 ) 의 하나인 '알티'의 문화고도 ( 文化故都 ) 를 점령하였으니, 고대의 전설과 기록이 적지 않았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기의 조선전 ( 朝鮮傳 ) 은 조선의 문화적·정치적 사실을 하나도 쓰지 않고, 오직 위만 ( 衛滿 ) 과 한병 ( 漢兵 ) 의 동침 ( 東侵 ) 을 썼을 뿐이니, 이는 조선전이 아니라 위만의 소전 ( 小傳 ) 이요, 한나라의 동방 침략의 약사 ( 略史 ) 이다. 위략, 삼국지 등의 책은 관구검 ( 母兵檢 ) 이 실어간 고구려의 서적으로 재료를 삼았으나 또한 그 폐습의 심리를 가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무엇에 의거하여 저들의 기록에 보인 조선들을 가지고 이것이 신조선이니, 말조선이니, 불조선이니 하는 구별을 내릴 것인가? 사기 조선에는 위만이 차지한 불조선만을 조선 ( 朝鮮 ) 이라 쓰는 대신에 신조선은 동호 ( 東胡 ) 라 일컬어서 흉노전에 넣었다.

그러니 이제 사기, 흉노전에서 신조선의 유사 ( 遺事 ) 를, 조선전에서 불조선의 유사를 초출 ( 抄出 ) 하고, 위략이나 삼국지의 동이열전 ( 東夷列傳 ) 의 기록을 교정하여 이를 보충하고 말조선은 지나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지나사의 필두에 오른 일은 적으나, 마한 ( 馬韓 ) ·백제 ( 百濟 ) 의 선대는 곧 말조선 말엽의 왕조이니, 이로써 삼조선이 갈라진 역사의 대강을 알 것이다.

 

 

 

삼조선(三朝鮮) 분립의 시작

 

대단군 ( 大檀君 ) 의 정제 ( 定制 ) 에는 비록 삼한이 있어 삼경에 나뉘어 머물렀으나, 신한은 곧 대단군이니 제사장으로서 겸하여 정치상의 원수가 되고, 말·불 두 한은 신한을 보좌하는 두 부왕에 지나지 않는 나라의 체제를 확립하였으므로, 삼조선이라는 명칭이 안는 나라의 체제를 확립하였으므로 삼조선이라는 명칭이 없었는데, 삼한이 분립한 뒤 삼조선이란 명사가 생겼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삼한이 어느 시대에 분립하였는가? 사기에 보인 진막벌조선은 전연시 (全燕時 ) 곧 연의 전성 시대라고 하였는데, 연의 전성 시대는 지나 전국시대 ( 戰國時代 ) 초이고, '발조선 ( 發朝鮮 ) '을 기록한 관자 ( 管子 ) 는 관중 ( 管仲 ) 이 지은 것이 아니고 전국시대의 위서 ( 僞書 ) 이며 '발숙신 ( 發肅愼 ) '을 기록한 대대례 ( 大戴禮 ) 는 비록 한인 ( 漢人) 대승 ( 載勝 ) 이 지은 것이지마는, 발식신 ( 發息愼) 운운 한것은 제인 ( 齊人 ) 추연 ( 鄒衍 ) 이 전한 것인데, 추연은 전국시대의 인물이다.

신·말·불 삼조선의 명사가 이같이 지나 전국시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니, 삼조선의 분립은 곧 지나 전국시대의 일이요, 지나 전국시대는 기원전 4 세기경이니 , 그러면 기원전 땅 4세기 경에 신·말·불 삼조선이 분립한 것이겠다.

신조선은 성이 해씨 ( 解氏 ) 니, 대단군 왕검의 자손이라 일컬은 자이고, 불조선은 성이 기씨 ( 箕氏 ) 니 기자 ( 箕子 ) 의 자손이라 일컬은 자이고, 말조선은 성이 한씨 ( 韓氏 ) 니 그 선대의 연원은 알 수 없으나, 왕부 ( 王符 ) 의 잠부론 ( 潛夫論 ) 에, “한 ( 韓 ) 의 서쪽도 역시 성이 한 ( 韓 ) 인데 위만 ( 衛滿 ) 에게 토벌당해 바다 가운데로 옮겨가 살았다 ( 韓西亦姓韓 爲衛滿所伐 遷居海中 ). ”고 하였으니, 한서 ( 韓西 ) 는 대개 말조선에 딸린 곳이므로, 말조선은 성이 한씨 ( 韓氏 ) 인가 한다.

위략 ( 魏略 ) 에, “기자 ( 箕子 ) 의 후손 조선후 ( 朝鮮候 ) 는 주 ( 周 ) 가 쇠해지고 연 ( 燕 ) 이 자존 ( 自尊 ) 하여 왕이 되서 동쪽으로 땅을 공략하려고 하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을 일컫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배후에서 쳐 주실 ( 周室 ) 을 높이려고 하다가 대부례 ( 大夫禮 ) 가 간하여 그만두고 대부례로 하여금 연을 설득하여 연은 공격하지 않았다 ( 箕子之後朝鮮候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候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 以尊周室 大夫禮 諫之乃止 使禮西說燕以之止 不攻 ). ”고 하였는데, 위략은 곧 서양의 백인종인 대진 ( 大秦 ) ·로마 ( 羅馬 ) 까지도 중국인의 자손이라 기록한 가장 지나식의 자존적 ( 自尊的 ) 병심리 ( 病心理 ) 를 발휘한 글이니, 그 글의 전부를 덮어놓고 믿을 수는 없으나 '신한', '불한'을 당시 조선에서 진한·마한·변한으로 음역한 이외에 '신한'은 혹 의역하여 '진왕 ( 辰王 ) ', '태왕 ( 太王 ) '이라고 하였으니 ( 다만 辰王의 辰은 음역 ) '신한'은 한자로 쓰면 조선왕 ( 朝鮮王 ) 이라 하였을 것이요, '말한', '불한'은 의역하여 좌보 ( 左輔 ) ·우보 ( 右輔 ) 라 하였으니, 한자로 쓰면 조선후 ( 朝鮮候 ) 라 하였을 것이므로 기자가 이 때에 '불한'의 지위에 었었으니 조선후라 일컬음이 또한 옳다.

'불한' 조선후 기씨가 '신한' 조선왕 개씨를 배반하고 스스로 '신한'이라 일컬어서 삼조선 분립의 판국을 열었는데, '불한'이 '신한'을 일컬은 것이 연(燕)이 왕을 일컬은 뒤요, 연이 왕을 일컬은 것은사기 에 주 ( 周 ) 에 신정왕 ( 愼王 ) 46 년, 기원전 323 년이니 신·말·불 삼조선의 분립이 기원전 4 세기 경임을 확증하는 것이고, 대부례는 대개 '불한'의 유력한 모사 ( 謨士 ) 니, '불한'을 권하여 '신한'을 배반하고 역시 '신한'이라 일컫게 하고, 연과 결탁하여 동·서 두 새 왕국을 동맹하게 한 이가 또한 대부례이니 대부례는 삼조선 분립을 주동한 중심 인물일 것이다.

삼조선 분립 이전에는 '신한'이 하나였는데,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 는 '신한'이 셋이 되었다. 곧 신조선의 '신한'이 그 하나요, 말조선의 '신한'이 그 둘이요, 불조선의 '신한'이 그 셋이니, 곧 대왕 ( 大王 ) 이라는 뜻이다.

 

 

 

[조선상고사 (원본) / 삼조선(三朝鮮) 분립시대 - 제1장 "삼조선(三朝鮮) 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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