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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처가 이황 - 애처가 일화와 이황 부인 권씨와의 관계]성리학을 꽃피운 조선 초기의 대학자를 대표하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이황은 애처가라는 얘기들이 전해져 옵니다. 애처가 이황의 부인 권씨는 지적장애인이었기에 오히려 더 많이 감싸고 챙겼다는 얘기입니다. 그의 일화 중 어떤 것들은 현대에도 부부 지침서로 기억할만 합니다. [엮인 글]정순왕후와 이사관의 야화 - 영조, 사도세자, 정조의 시대 애처가 이황 부인 권씨 퇴계 '이황'은 1501년에 태어난 학자입니다. 율곡 '이이'는 이황을 가르켜 '공자' - '주자'를 잇는 대학자라고 했습니다. 이토록 큰 영향을 끼친 이황은 애처가라는 평도 받습니다. 우주 만물을 성리학의 이치에서 바라본 이황은 부부라고 할지라도 손님을..
[문종 아들 단종 죽음 - 세조(수양대군)와 단종 유배지 영월]단종은 수양대군이 반란을 일으켜서 쫓겨났습니다. 그 후 단종은 영월 청령포의 유배지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복위 사건이 터진 후 세조는 단종을 죽이기로 하고 사약을 내립니다. 단종의 죽음 후 시신은 버려진 채 아무도 돌보지 않았는데, 100년이 흐른 뒤에야 무덤이 발견되어서 지금의 장릉이 되었습니다. [엮인 글]단종과 영월부사 박충원 - 귀신 이야기와 엄흥도문종, 단종, 세조의 역사조선왕조 계보의 첫 머리는 "태정태세문단세"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단"이 '단종'입니다. 4대 왕부터 보면, 세종-문종-단종-세조의 순서이며 단종은 '문종'의 아들이고 세종의 손자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피비릿내 나는 일이 많았습니다. 3대 왕인 '태종'과 ..
[여종 갑이의 복수이야기 - 명종시대 정순붕의 염병과 을사사화]야사 중에 여종 갑이에 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갑이라는 여종이 주인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양반을 죽이고 복수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는 명종 원년에 있었던 을사사화에서 죽은 유관과 연결됩니다. 그로인해 명종 3년, 유관을 죽게 한 정순붕을 염병에 걸려 죽게 한다는 이야기를 쫓아가 봅니다. [글의 순서]명종과 을사사화의 배경여종 갑이의 복수정순붕과 여종 갑이의 죽음 명종과 을사사화의 배경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7년 전인 1545년, 열 두 살의 어린 나이로 `명종`이 왕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당시 좌의정을 하던 사람이 `유관`이었는데, 양반인 유관의 가족묘에는 `갑이`라는 노비가 같이 묻혀 있습니다. 노비가 양반의 가족묘지에 함께 묻히는 일..
[화산관 이명기(초상화가)와 카메라 옵스큐라의 조선 사실주의]조선 시대의 가장 유명한 화가는 김홍도와 신윤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초상화에서만은 이들보다도 높이 평가받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산관 이명기입니다. 이명기의 아버지 이종수 등 가족들도 그림 잘 그리기로 유명하였습니다. 이명기가 카메라 옵스큐라 방법을 이용했다는 주장이 있어서 그에 대해 알아봅니다. [글의 순서]초상화가 이명기의 생애카메라 옵스큐라 원리와 뜻이명기와 카메라 옵스큐라 초상화가 이명기의 생애 화산관 '이명기'는 조선 후기인 1700년대 말의 '정조'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였습니다. 이때는 우리가 조선 최고의 화가로 알고 있는 '김홍도'와 '신윤복'도 살고 있던 시대였으며, 이명기는 김홍도와 함께 일을 하였습니다. 왕의 '어진'과 권..
[석호필 박사 - 프랭크 스코필드의 생애와 호랑이스코필드장학문화재단]국립현충원에는 한국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묻혀 있습니다. 여기에는 유일하게 외국인이 한 명 안장되어 있는데, 프랭크 스코필드(석호필 박사)입니다. 그는 1919년 3.1운동에 34번째 민족대표로 참가했으며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려 광복에 도움을 준 사람입니다. 한국의 민주화를 바랬던 석호필 박사는 한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970년 운명하였습니다. [글의 순서]수의학자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의 삶한국을 사랑한 석호필 박사의 의미 [엮인 글]프랭크 스코필드 - 민족대표 34인의 석호필 박사와 제암리 학살사건박찬욱의 스토커와 시나리오 작가 석호필(웬트워스 밀러) 수의학자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의 삶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김창수(김구) 치하포 사건 실화 - 명성황후 시해범 살해 논란]김구의 백범일지는 거의 온 국민의 필독서입니다. 하지만 백범일지를 토대로 영화가 만들어지거나 할 때마다 기록이 잘못 됐다는 논란이 끊이질 않습니다. 특히 젊은 시절의 김창수(김구 본명)가 치하포 사건에서 명성황후 시해범이라며 살인을 한 것은 논란이 많습니다. [글의 순서]1. 김창수(김구) 치하포 사건 역사2. 김구(김창수)의 치하포 사건 논란3. 김구 치하포 사건 추론과 최초의 전화 논란 김창수(김구) 치하포 사건 역사 백범 '김구' 본명은 '김창수'입니다.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김창수가 '치하포 사건'을 겪은 해는 스물 한 살이 되는 1896년의 일입니다. 김구가 태어난 1876년은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이 ..
[인조의 삼전도 굴욕 보다 더 했던 백성들의 정묘호란 병자호란] [엮인 글]병자호란과 남한산성 역사 줄거리 - 남한산성 전투병자호란 남한산성 패배의 원인 - 김자점과 이괄의 난임진왜란부터 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남한산성까지 나라의 패망은 지도층으로 부터 시작된다 기존의 사대국인 명나라와 신생 강자인 후금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하던 광해군을 내 쫓고 왕에 오른 인조와 집권당인 서인은 명나라에 대한 극사대 외교를 벌입니다. 이에 후금에서 이름을 바꾼 청나라는 조선 침략의 꼬투리를 잡고 침략을 하는데, 잘 알려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정권욕에 눈이 먼 집권층의 잘 못된 판단과 구태의연한 보수적 집단의 문제가 한 나라의 모든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만드는 순간입니다. 심지어 이괄의 난 ..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역사 줄거리 - 남한산성 전투]16세기와 17세기는 조선에게 최악의 시기였습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40여 년 동안 연이어 겪었으니, 평생 네 번의 대 전쟁을 겪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왕이 항복을 하던 삼전도의 치욕 등 병자호란 남한산성과 역사 줄거리를 통해, 현대의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도 중요한 일입니다. [글의 순서]1. 병자호란 남한산성 - 백성2. 남한산성 줄거리 - 청나라3. 남한산성 전투 - 조선4. 역사 줄거리 - 남한산성 [엮인 글]병자호란 남한산성 패배의 원인 - 김자점과 이괄의 난임진왜란부터 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남한산성까지인조의 삼전도 굴욕 보다 더 했던 백성들의 정묘호란 병자호란 남한산성 역사 줄거리 1 - 백성 ..
[임진왜란부터 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남한산성까지]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불과 40여 년 만에 벌어진 대 전쟁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대외적으로는 후금이 강해지면서 청나라가 되었고, 대내적으로는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쫓겨났습니다. 청나라의 국제정세와 조선과의 관계를 통해 병자호란의 원인과 배경에 접근해 봅니다. [글의 순서]1. 정묘호란과 국제정세2. 병자호란과 청나라3. 인조반정과 외교4. 병자호란과 조선의 악재 [엮인 글]병자호란과 남한산성 역사 줄거리 - 남한산성 전투병자호란 남한산성 패배의 원인 - 김자점과 이괄의 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1 - 국제정세 '병자호란'의 원인으로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반정세력의 '배금친명 정책(후금을 멀리하고 명나라를 중시)'이 주로 거론되지만, 오직 그것만..
[병자호란 남한산성 패배의 원인 - 김자점과 이괄의 난]병자호란은 청나라의 등장으로 국제정세가 변한 원인과 조선 인조의 대처가 무능력했던 원인도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겹친데 덮친 격으로 악재도 있었습니다. 병자호란 남한산성 패배의 원인 중 하나인 이괄의 난과 김자점 문제는 백성들이 피눈물을 치러야 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글의 순서]1. 정규군을 날려먹은 이괄의 난2. 정묘호란의 패배 - 이괄의 난3. 무능한 인조의 총애를 받은 김자점4.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패배 - 김자점 [엮인 글]병자호란과 남한산성 역사 줄거리 - 남한산성 전투임진왜란부터 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남한산성까지 정규군을 날려먹은 이괄의 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선조와 함께 무능한 왕으로 꼽힙니다. 사대주의에..
[박연과 하멜표류기 - 네덜란드인의 훈련도감과 병자호란]지금은 다문화시대가 되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서양인은 보기 힘든 존재였습니다. 조선 중후기에 드디어 최초로 서양인이 조선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 이름이 네덜란드인 박연과 하멜입니다. 그러나 하멜은 조선을 떠나 하멜표류기를 썼고, 박연의 후손은 조선인이 되었습니다. 하멜의 통역을 맡은 박연과의 인연을 중심으로 두 사람의 인생을 조명해 봅니다. [글의 순서]1. 박연과 하멜이 오기 전의 조선2. 박연 - 훈련도감, 귀화인, 병자호란3. 하멜 - 박연의 통역과 하멜표류기4. 하멜과 박연의 훈련도감 5. 박연과 하멜표류기의 그후 박연과 하멜이 오기 전의 조선 유교사상의 국가 조선은 중국만을 최고로 아는 사상 때문에 중후기가 되면서 더욱 고립되어 갔습..
[이이, 유지 - 율곡 이이와 기생 유지의 사랑이야기, 유지사(柳枝詞)]율곡 이이는 조선시대의 대학자이고, 유지는 이이를 흠모했던 기생입니다. 기생이라는 신분과 학자라는 신분, 그리고 나이 차가 많은 만남... 학자와 기생의 사랑이야기라고 하기엔 낯선 관계지만, 율곡 이이와 유지에 대한 일화는 흔하지 않게 맑고 애틋한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이이와 유지의 사랑이야기는 율곡이 남긴 유지사에 전해져 옵니다. [글의 순서]1. 십만양병설의 대학자 율곡 이이2. 율곡 이이와 유지의 사랑이야기3. 학자와 기생의 플라토닉 러브4. 기생 유지를 걱정하는 유지사 십만양병설의 대학자 율곡 이이 율곡 이이는 조선 선조 때 벼슬을 한 사람으로 1500년대 중반에 살았습니다. 과거에 9번이나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공'으로 불..
[추사 김정희 세한도그림 뜻과 주제 - 손재형이 지킨 문화재]문화재를 지키려는 한 사람의 노력 덕분에 일본으로 넘어간 국보가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 온 일화가 있습니다. 국보 세한도는 하마터면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림일 수도 있었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그림을 살려낸 서예가 손재형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또한 이 그림은 문인화이므로 미술적인 해석보다는 세한도의 뜻과 주제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글의 순서]1. 세한도그림과 손재형의 사연2. 추사 김정희와 손재형, 그리고 손창근3.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그림 [엮인 글 링크]한국 미술사의 공헌자이며 간송미술관의 설립자 전형필 세한도그림과 손재형의 사연 '추사 김정희'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조선의 문인입니다. 김정희의 '세한도'는 많..
[조선 예종 가계도와 성종의 즉위 - 예종의 죽음과 권력암투]조선왕조계보의 8대 왕인 예종은 워낙 짧은 기간 동안 왕위에 있었기 때문에 존재감이 없지만,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엄했던 군주입니다. 영화 의 주인공 예종은 가계도 내의 권력암투와 남이장군 옥사 사건으로 드라마에도 잠간씩 나오곤 합니다. 12세에 아들을 보았으나 너무 일찍 요절하여 결국 성종이 뒤를 잇게 되는 조선 예종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니다. [글의 순서]1. 예종의 가계도2. 예종과 훈구파 한명회3. 조선 예종의 죽음 [관련 링크]조선 문종의 이혼과 결혼들 - 현덕왕후와 단종 죽음의 배경 조선 예종의 가계도, "임금님과 사건수첩" 조선 '예종'은 1468년에 즉위하였습니다. 세종 - 문종 - 단종 - 세조 - 예종 - 성종으로 이..
[조선 문종의 이혼과 결혼들 - 현덕왕후와 단종 죽음의 배경]엄격한 유교국가의 왕인 조선 문종은 두 번의 이혼과 세 번의 결혼을 하였습니다. 성군이었던 세종이 아버지이고 문종 또한 출중한 학문과 성품, 그리고 외모까지 겸비한 엄친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이 엄격한 조선시대에 문종은 두 번이나 이혼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문종의 아들 단종이 왕권을 빼앗기는 것에도 연결되는데... 이 글은 문종과 부인들에 얽힌 조선 왕실의 뒷이야기입니다. [이 글의 순서]1. 문종의 첫 이혼 휘빈 김씨2. 문종의 두번째 이혼 순비 봉씨3. 현덕왕후와 단종 문종의 첫 번째 결혼과 이혼 - 휘빈 김씨 태평성대를 연 세종에게 '문종'은 아주 특별한 세자였습니다. 유교국가를 표방하며 조선이 건국되었지만, 피비린내 ..
[조선제일침 허임 - 허준도 인정한 침의 명의 허임]역사에 기록된 최고의 명의라면 누구나 허준을 뽑을 것입니다. 그런데 침과 뜸 부분에서의 명의는 따로 있습니다. 그는 조선 제일침이라 불리는 허임입니다. 상민으로 관직에 오른 유명한 발명가로 장영실이 있는데, 허임도 상민에서 의술로 벼슬에 오른 사람입니다. 당대 최고의 침술 의원이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까지 최고의 침술로 인정받은 허임의 삶을 얘기해 봅니다. [이글의 순서]1. 명의 허준과 조선제일침 허임2. 조선제일침 허임의 삶3. 허임의 일화와 침구경험방 명의 허준과 조선제일침 허임 동의보감으로 유명한 '허준'은 한국인이라면 어린 아이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동의보감'은 1610년 광해군 때 금속활자로 제작된 의학서입니다. 한국 뿐 아니라..
안용복의 생애와 독도 사건 - 독도영유권을 위해 활약한 조선시대 어부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독도는 첨예한 분쟁지역입니다. 독도 영유권 문제는 국제적으로도 영향이 크기 때문에, 역사에서 실효적 지배를 누가 해 왔냐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이때 중요한 인물로 기록된 사람이 독도사건의 안용복입니다. 안용복의 생애는 조선의 미천한 신분이었다고 하지만, 역사적 활약으로 조선이 독도를 지배했다는 기록이 남도록 하는 공헌을 세웠습니다. 안용복의 생애 - 독도 사건의 활약 안용복은 1690년대 숙종 때의 인물로, 왜에게 조선의 공식적인 독도 영유권을 위해 활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조선을 대표할 관리이거나 지도층이 아니라, 안용복의 생애가 미천한 신분이었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하지 못한 ..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뜻과 진실 - 흥선대원군시대의 지도 지도는 기술이며 문명입니다. 인공위성도 없던 시대에 정확한 지도를 만든다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첨단기술을 가진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해낸 사람이 고산자 김정호지만, 흥선대원군 일화 등 알게 모르게 잘 못 알려진 것들이 꽤 많습니다. 다행히 대동여지도의 진실이 서서히 알려지고 있긴 합니다. 김정호의 호인 고산자의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정호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정확한 지리정보를 위해 헌신한 인물입니다. 그의 헌신 덕분에 우리는 대동여지도라는 세계적인 지도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동여지도란 뜻은 큰 조선 땅의 지도라는 뜻입니다. 고산자 김정호와 흥선대원군에 얽힌 오해와 진실 이제는 제법 알려져서 다행이지만, 한동안 잘 못..
정도전의 성격과 정도전 업적, 요동정벌, 민본주의 과전법 평가 정도전은 드라마에 나오는 것과 다른 외모를 가졌다고 합니다. 성격도 천재적인 이미지와는 사뭇 다릅니다. 그래서 궁금증을 주는 역사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정도전의 많은 활약 중 가장 관심을 많이 받는 것은 과전법과 요동정벌입니다. [엮인 글 링크]정도전의 최후 - 이방원의 왕자의 난과 정도전의 죽음 정도전의 개혁과 건국, 정도전의 성격 정도전은 고려 말, 1300년대 중반에 경북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중앙 벼슬에 진출하면서 정도전도 자연스럽게 성균관에서 이색에게서 성리학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정몽주, 설정주, 하륜, 권근, 이숭인 등과 함께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과거급제 후 친원정책을 하던 이인임에 반하여 친명을 주장하다가 미움을 사서 유..
[정도전의 최후 - 이방원의 왕자의 난과 정도전의 죽음] 조선 건국의 절대적인 인물 정도전의 최후는 처참했습니다. 정도전은 비명의 죽음을 맞게 되고, 그 후 수백 년 동안 나쁜 평가 속에 있었습니다. 한 국가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조선이 수백 년간 지속될 통치체계를 만들었지만 정도전의 죽음은 묘도 남아있지 못할 정도의 최후였습니다. 정도전은 이방원의 왕자의 난에 의해 최후를 맞은 후 무려 500년을 간신으로 치부 당했던 것입니다. [엮인 글 링크] 정도전의 성격과 정도전 업적, 요동정벌, 민본주의 과전법 평가 왕자의 난 이전의 정도전과 이방원 정도전과 이성계는 친구같은 군신관계였습니다. 이성계를 왕위에 올려준 인물이 정도전이지만, 조선건국 이후 정치, 경제, 체제, 사상, 국방, 심지어 외교에까지도 정도..
[차례 제사 상 차리기 - 홍동백서, 조율이시, 어동육서는 근거 없는 말] 한국인은 제삿날 외에도 설날, 추석에 제사상을 올립니다. 제사 상 차리기는 워낙 번거로워서 홍동백서, 조율이시, 어동육서 등을 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때 이런 말들이 근거가 없다는 것이 밝혀져 화제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실질적인 차례상의 의미보다 허례허식을 중요시한 풍토가 만들어낸 말들이라고 합니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어동육서 근거 없는 말 유교국가를 자처해 온 조선은 예법에 따라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전통은 지금도 중요하게 전해지지만, 상다리가 휘도록 제삿상을 차리다 보면 명절이 오히려 힘들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옛 유교 문헌에서 홍동백서나 조율이시, 좌포우혜, 어동육서 등은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다시 ..
[장영실의 업적, 장영실과 세종의 드라마틱한 생애- 장영실의 발명품들] 1400년대의 조선을 세계 최고의 과학 선진국으로 만든 두 사람, 장영실과 세종은 말 그대로 드라마틱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조선의 성군을 대표하는 세종의 업적은 말할 것도 없고, 출생부터 사망에까지 베일에 싸여진 장영실의 삶 또한 드라마틱합니다. 천민에서 양반에 오른 발명 신화, 장영실의 생애 장영실의 업적에 비해 생애는 정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장영실의 출생이 천민 신분이었고, 사망도 쫓겨난 뒤 기록이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영실이 천민 소생이라고 하지만 아산 장씨 후손들은 장영실이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조선시대의 "일천즉천"원칙 때문입니다. 양친 중 한 사람이라도 천민이면 그 사이의 자식은 천민이 됩니다. 원..
[맹사성 - 세종의 청렴한 정승, 맹사성의 일화와 황희정승과의 비교] 조선 초 세종의 놀라운 업적에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해서 모범을 보이는 삼정승이 있었습니다. 황희, 맹사성, 윤회는 세종의 측근으로 재상을 맡아 조선의 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맹사성은 예의가 바르고 소박하면서도 업무에는 강직하여 공직자의 모범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청렴한 세종의 정승, 맹사성의 생애와 업적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녀 사위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맹사성은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는 최영 장군을 본받아 살고자 했다고 합니다. 재능이 있고 성품이 올바르기 때문에 최영의 숙적인 이성계도 맹사성을 조선 건국 후에도 중용하였습니다.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와 좌의정에 오르기까지 맹사성은 세종의 여진정벌을 돕고 조선 초의 음악..
[위화도회군의 배경,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은 옳았나] 역사에서 만약이란 없겠지만, 고려 말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의 배경과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겠습니다. 위화도회군은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촉발한 일대 사건이며, 동시에 이성계가 개인의 야망을 위해 일으킨 군사쿠데타이고 하극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박정희 시대에는 긍정적인 역사적 결단으로 평가 받았습니다. 반면 북한에서는 역적으로 평가한다고 합니다. 위화도 회군 이전의 국제 정세 위화도회군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1388년이 될 때까지의 흐름을 잘 봐두는 것이 좋습니다. 918년 고려의 건국 이후 고려는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기풍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자부한 고려는, 중국에 사대적인 신라를 흡수하였고 대륙을 주름잡던 발..
[임나일본부설에서 한반도남부를 통치했다는 신공(진구) 왕후] 역사 왜곡이 심하기로 유명한 일본의 "서기"에 근거해서, 일본은 4~6세기에 한반도의 남부를 일본이 지배했다며 임나일본부설과 삼한정벌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때 나오는 일본의 지배자가 신공황후입니다. 혹은 진구황후라고도 하는데 19세기에 일본 지폐에 등장하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이 진구황후 또는 신공황후는 일제가 한반도 침략의 당위성으로 활용한 인물이이기도 합니다. 신공왕후는 어떤 인물인가? 국내 사전을 찾아보면 진구황후, 신공황후라고 나오는데, 일본측 사료를 존중한다는 의미는 있겠으나 고쳐져야 할 일입니다. 일본인들은 천황이라고 부르지만 황제의 요건은 되지 못하니 그냥 진구왕후, 신공왕후라고 해야겠습니다. 일본이라는 국호도 겨우 7세기 중반..
[김덕령, 곽재우, 이산겸 - 임진왜란의 의병장, 역적으로 몰리다] 익호장군 김덕령장군은 이몽학의 난 때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려서 죽었습니다. 홍의장군 곽재우장군도 역모를 했다는 의심을 받은 후 은둔하여 살았습니다. 이산겸장군은 송유진의 난 때 역시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었습니다. 김덕령장군, 곽재우장군, 이산겸장군 등의 역모 사건을 통해 역사를 보는 이들은 이순신장군이 전사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이순신도 선조와 정치세력에 의해 역적으로 몰렸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임진왜란 이후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에서 의병활동이 침체기를 맞게 된 것도 김덕령, 이산겸 등 역적으로 누명을 쓰고 죽은 의병장들이 영향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역적의 누명을 쓴 김덕령장군은 죽어서 신격화되다 김덕령 의병장군은 담양에..
[미국 영토 성장기 - 돈과 전쟁으로 얼룩진 자본제국주의 역사] 미국은 약 250년 전인 18세기 후반에 독립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자본제일주의 국가라고 하면 미국을 떠 올리듯이 미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역시나 자본의 투자와 전쟁으로 성장한 나라입니다. 국내 경제강자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해온 미국에게는 돈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무기가 있었습니다. 미국은 원래 영토의 수배를 돈으로 사고, 전쟁을 통하여 영향력을 지속시켜왔습니다. 아래는 관련 글 링크입니다. [엮인 글] 영화 라스트모히칸 역사배경 - 프렌치 인디언 전쟁과 원작 소설 13개 주의 해안국가에서 거대한 영토로 확장한 미국 잘 알다시피 미국은 연방국가입니다. 미국, 러시아, 독일, 브라질, 캐나다 등 유럽과 남미, 중동, 아프리카 등에도..
[임진왜란 명나라의 평양성전투 필승전법 - 원앙진으로 일본 검술 격파] 원앙진이 임진왜란 평양성 전투에서 공을 세우다 임진왜란이라고 하면 일본군의 조총을 먼저 떠 올리지만 사실 일본의 최대 강점은 조총이 아니라 검법이었습니다. 멀리서는 조총으로 기선을 제압하고 가까이에서는 날렵한 칼을 휘두르니 조선군은 대적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명나라도 임진왜란 이전부터 왜구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원앙진입니다. 우리가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을 한산도 대첩, 진주 대첩, 행주 대첩을 꼽듯이 일본도 3대 대첩을 꼽는데, 그 중 하나가 평양성 전투입니다. 16세기, 평양성에서는 4번의 큰 전투가 있었습니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후 60일 만에 평양성을 점령하는데, 1/6정도의 병력밖에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