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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아들 단종 죽음 - 세조(수양대군)와 단종 유배지 영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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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아들 단종 죽음 - 세조(수양대군)와 단종 유배지 영월

키스세븐지식 2018. 5. 1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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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아들 단종 죽음 - 세조(수양대군)와 단종 유배지 영월]

단종은 수양대군이 반란을 일으켜서 쫓겨났습니다. 그 후 단종은 영월 청령포의 유배지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복위 사건이 터진 후 세조는 단종을 죽이기로 하고 사약을 내립니다. 단종의 죽음 후 시신은 버려진 채 아무도 돌보지 않았는데, 100년이 흐른 뒤에야 무덤이 발견되어서 지금의 장릉이 되었습니다. 




문종, 단종, 세조의 역사

조선왕조 계보의 첫 머리는 "태정태세문단세"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단"이 '단종'입니다. 4대 왕부터 보면, 세종-문종-단종-세조의 순서이며 단종은 '문종'의 아들이고 세종의 손자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피비릿내 나는 일이 많았습니다. 3대 왕인 '태종'과 7대 왕인 '세조'는 형제와 조카를 죽여 가며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단종의 죽음은 삼촌인 세조(즉,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의해 벌어진 참극입니다.

사진: 최근 발견된 세조의 어진. 김은호 화백이 그린 그림.(사진: 최근 발견된 세조의 어진. 김은호 화백이 그린 그림. [세조, 단종, 문종, 수양대군] / ⓒ 김은호)



문종은 단종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며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1453년 '계유정란'이 일어나고, 1455년 단종은 세조(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이양을 하고 '상왕'이 되는 모양새였지만, '한명회' 등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456년 복위시키려던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며 단종은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로 보내졌습니다. 열두 살에 즉위한지 3년 만에 '노산군'으로 강등된 것입니다.

사진: 단종 어진. 김호석 화백 그림. 단종 죽음은 비극이었다.(사진: 단종 어진. 김호석 화백 그림. 단종 죽음은 비극이었다. [단종, 세조, 유배지, 영월] / ⓒ 김호석)



세조가 단종을 유배 보내는 중에 부인과도 생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청계천 영도교에서 열다섯 살의 단종과 열여섯 살의 정순왕후는 눈물을 쏟았습니다. 이것은 단종 죽음의 날까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이었습니다.
단종은 유배지에 와서도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강원도 영월의 '노산대'는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슬퍼했다는 곳입니다. 단종은 문종의 기대를 듬뿍 받고 자랐으나, 문종이 세상을 떠나며 모든 것이 달라져버렸습니다.


단종 유배지에서의 진실

단종이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에서 생활한 것도 잠간이었습니다. 1457년 경북 '순흥부'에서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 운동을 한 것입니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며 문종의 동생입니다. 세종의 장남이 문종이며 둘째가 세조(수양대군)이었는데, 금성대군은 둘째 형의 반란에 반대하며 조카 단종의 편에 섰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금성대군이 세조의 사약을 받게 되었는데, 이 사건을 '정축지변'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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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단종 유배지 영월의 한옥. 단종 죽음 전에는 관아로 거쳐를 옮겼다.(사진: 단종 유배지 영월의 한옥. 단종 죽음 전에는 관아로 거쳐를 옮겼다. [단종, 영월, 청령포, 유배지] / ⓒ Naturehead)


금성대군의 정축지변의 화가 결국은 단종 죽음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육신 사건으로 단종이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로 가게 되었고, 이번에는 정축지변으로 제거될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세조는 단종에게도 사약을 내렸습니다. 김종서 등의 공신을 죽이고 사육신 등 충신을 죽인 후 금성대군 등 형제를 죽였습니다. 그런 세조가 이번에는 조카마저 죽이는 것입니다.

사진: 단종 유배지 청령포 전경.(사진: 단종 유배지 청령포 전경. [문종, 단종, 세조, 영월] / ⓒ Republic of Korea)


<숙종실록>에 의하면 의금부의 도사 '왕방연'이 단종에게 세조의 사약을 전하기 위해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차마 사약을 먹으라고 강요하지 못하고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왕방연을 모시던 졸개가 단종을 죽음에 몰아넣었다는 것입니다.
야사에 의하면, 그 졸개는 '복득이'라는 인물이었고, 뒤에서 단종의 목을 활줄로 조아서 교살했다고 전해집니다. 단종이 죽음을 맞은 것은 겨우 열일곱 살 때의 일입니다.

사진: JTBC 드라마 인수대비의 한 장면. 단종의 죽음.(사진: JTBC 드라마 인수대비의 한 장면. 단종의 죽음. [단종, 유배지, 세조, 수양대군] / ⓒ JTBC)



하지만 <세조실록>에서는 단종 죽음을 자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종이 유배지에서 금성대군의 죽음을 전해들은 뒤, 슬픔을 못 이기고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숙종실록>에서는 직접적으로 타살 정황을 적고 있으니, 세조실록이 단종 죽음의 역사적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 거짓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숙종실록에 의한다면, 단종이 사약을 거부하다가 죽음을 맞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종 죽음, 그 이후

금성대군이 사약을 받고 죽었을 때처럼 단종 죽음 후의 상황도 비슷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었고 단종은 문종의 적통이었지만, 세조에 의해 역적이라며 사약을 받았으니, 그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중종' 때까지 단종의 무덤은 찾을 수가 없었는데, '박충원'이란 자가 결국 단종의 묘를 찾아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영월부사의 귀신 이야기로 야사가 되었습니다.

사진: 단종 죽음 후 시신을 수습하여 충신으로 오른 엄흥도.(사진: 단종 죽음 후 시신을 수습하여 충신으로 오른 엄흥도. [단종, 엄흥도, 유배지, 세조] / ⓒ Unkown)



뒤늦게나마 단종의 무덤을 찾아낸 것에는 '엄흥도'라는 인물의 공이 컸습니다. 단종 죽음을 측은하게 여긴 엄흥도는 아무도 모르게 시신을 수습한 후, 자신의 재산을 들여서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도 역적으로 몰릴지 모르기 때문에 아들을 데리고 멀리 도망가서 숨어 살았습니다.
그리고 단종 유배지에 간 박충원이 단종의 원한을 알게 된 후, 엄흥도를 찾아가서면서 드디어 단종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단종 죽음을 묘사한 동상. 현재 충절의 상으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사진: 단종 죽음을 묘사한 동상. 현재 충절의 상으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 [문종, 단종, 엄흥도, 세조] / ⓒ gangwon.to)



문종 아들인 단종 죽음은 1450년대의 일이고, 중종이 단종 유배지에서 무덤을 찾게 된 것은 1500년대의 일이며, 숙종이 단종을 복권시켜서 다시 왕으로 모신 것은 1690년대의 일입니다. 단종은 세조(수양대군)에 의해 애절하게 죽은 뒤, 무려 240여 년이나 지난 뒤에야 다시 왕으로서 기록될 수 있었습니다.
본인의 잘못이 전혀 없이 쫓겨나고 목 졸려 참혹하게 죽은 조선의 왕은 단종 밖에 없습니다.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삼촌에 의해 사약을 받아들어야 했던 참혹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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