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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과 하멜표류기 - 네덜란드인의 훈련도감과 병자호란 본문

유용한 지식 칼럼/역사&사건

박연과 하멜표류기 - 네덜란드인의 훈련도감과 병자호란

키스세븐지식 2017. 9. 7. 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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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과 하멜표류기 - 네덜란드인의 훈련도감과 병자호란]

지금은 다문화시대가 되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서양인은 보기 힘든 존재였습니다. 조선 중후기에 드디어 최초로 서양인이 조선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 이름이 네덜란드인 박연과 하멜입니다. 그러나 하멜은 조선을 떠나 하멜표류기를 썼고, 박연의 후손은 조선인이 되었습니다. 하멜의 통역을 맡은 박연과의 인연을 중심으로 두 사람의 인생을 조명해 봅니다. 




[글의 순서]

1. 박연과 하멜이 오기 전의 조선

2. 박연 - 훈련도감, 귀화인, 병자호란

3. 하멜 - 박연의 통역과 하멜표류기

4. 하멜과 박연의 훈련도감 

5. 박연과 하멜표류기의 그후





박연과 하멜이 오기 전의 조선 


유교사상의 국가 조선은 중국만을 최고로 아는 사상 때문에 중후기가 되면서 더욱 고립되어 갔습니다. 네덜란드인 '박연'과 '하멜'이 조선에 올 즈음, 중국과 일본이 유럽 국가들과 교역을 시작했지만 조선은 지리적으로도 불리했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중국, 일본에 비해 큰 바다를 통한 뱃길이 불리하였고, 둘째는 상공업을 얕잡아 보는 풍토로 인하여 국제교역도 저조했기 때문입니다. 


사진: 최초의 서양 귀화인은 박연이다. 조선 인조 때 난파하여 제주도에 온 후 조선인으로 귀화한 벨테이브가 바로 네덜란드의 박연이다. [박연과 하멜이 오기 전의 조선](사진: 최초의 서양 귀화인은 박연이다. 조선 인조 때 난파하여 제주도에 온 후 조선인으로 귀화한 벨테이브가 바로 네덜란드의 박연이다. [박연과 하멜이 오기 전의 조선] / ⓒ Bryan)


16세기, 인도양과 동남아를 지난 유럽의 배들이 난파당하거나 정박이 필요해서 일본에 머무는 경우가 늘어났습니다. 이후 일본은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과 교역하며 동양 삼국 중 가장 활발히 서양과 교역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인도양 해상경로 때문에 유럽인들의 접근로는 항상 남쪽이었으므로, 조선과 일본은 이들을 '남만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남만인의 뜻은 "남쪽 오랑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은 박연의 나라가 그저 남쪽나라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의 해상무역 경로. 중국과 일본을 주로 방문했으며 남쪽에서 올라온 해상무역 항로에서 조선은 외톨이였다. [박연과 하멜이 오기 전의 조선](사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의 해상무역 경로. 중국과 일본을 주로 방문했으며 남쪽에서 올라온 해상무역 항로에서 조선은 외톨이였다. [박연과 하멜이 오기 전의 조선] / ⓒ www.kiss7.kr)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하멜과 박연은 조선에 등장한 초기의 서양인입니다. 그런데 이들보다도 더 이전에 등장한 사람이 있었으니 1580년대의 '마리이'와 1600년대의 '주앙 멘데스'입니다. 마리이의 국적은 알 수 없고, 주앙 멘데스는 포르투갈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조선의 정책은 서양인의 송환을 중국에 위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국제 사회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중국보고 처리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마리이와 주앙 멘데스는 중국으로 보내진 후 송환되었다고 합니다. 


사진: 박연. 네덜란드 현지에 박연의 고향에는 무사복을 입은 동상이 있다. 박연은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는 무관이었으므로 조선의 무관복을 표현한 작품이다. [박연과 하멜이 오기 전의 조선](사진: 박연. 네덜란드 현지에 박연의 고향에는 무사복을 입은 동상이 있다. 박연은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는 무관이었으므로 조선의 무관복을 표현한 작품이다. [박연과 하멜이 오기 전의 조선] / ⓒ MartinD)


드디어 1627년, 최초로 조선에 정착하여 살게 되는 서양인 박연이 제주도에 표류하게 됩니다. 네덜란드인 박연의 본명은 '얀 야너스 벨테브레(Jan Janesz Weltevree)'라고 합니다. 대항해시대의 유명한 '동인도회사'가 네덜란드에도 있었으며, '하멜표류기'로 유럽에 조선이 알려지게 한 네덜란드는 무역이 활발했던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때의 나이가 30대 중반이었으며, 당시 조선의 왕은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에서 항복하게 될 인조였습니다. 





박연 - 훈련도감, 귀화인, 병자호란


네덜란드인 박연은 동인도회사 소속의 배에서 장교로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 상선을 나포한 후 일본에 설치된 동인도회사에 넘기려고 제주도 앞을 지나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식수가 떨어지고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여 선원 두 명과 잠시 제주도에 내렸다고 합니다. 그때 중국인들이 배를 다시 빼앗아 도망가는 바람에 제주도 관리자에게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조선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서, 식인을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 군인들이 밤에 불을 피우자 잡아먹히는 줄 알고 통곡하며 울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사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18세기 모습. 스페인, 포르투갈에 이어 대항해시대를 열어간 네덜란드는 주로 국제무역을 하여 돈을 벌었다. [박연 - 훈련도감, 귀화인, 병자호란](사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18세기 모습. 스페인, 포르투갈에 이어 대항해시대를 열어간 네덜란드는 주로 국제무역을 하여 돈을 벌었다. [박연 - 훈련도감, 귀화인, 병자호란] / ⓒ Thomas H. Shepherd)


일단 이들은 한양으로 압송된 후, 조선의 외국인 처리방침에 따라 중국으로 보내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중국은 명나라와 청나라가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던 때라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일본으로 보내려고도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교섭이 되지 않아서 얼떨결에 조선에 남게 되었습니다. 

벨테브레(박연)와 동료인 '디렉 헤이스베르츠', '얀 페에테르츠'는 덩치가 좋고 총포 기술이 있어서 '훈련도감'에 근무하였습니다. 


사진: 서울 훈련도감의 위치. 박연과 서양인 동료들은 병자호란에서 조선을 위해 싸웠고 동료들은 전사하고 말았다. 하멜표류기가 쓰여진 것보다 더 오래 전의 일이다. [박연 - 훈련도감, 귀화인, 병자호란](사진: 서울 훈련도감의 위치. 박연과 서양인 동료들은 병자호란에서 조선을 위해 싸웠고 동료들은 전사하고 말았다. 하멜표류기가 쓰여진 것보다 더 오래 전의 일이다. [박연 - 훈련도감, 귀화인, 병자호란] / ⓒ Pablin)


그런데 1636년 청나라가 쳐들어와서 '병자호란'이 일어났습니다. 이 네덜란드인들은 알지도 못했던 먼나라 조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고, 디렉과 얀이 전사하기도 했습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의 항복을 해야 했지만, 벨테브레(박연)를 인정하고 기용하였습니다. 

이 네덜란드인은 완전히 귀화를 결심하고 무과에 응시하여 조선의 무관이 되었습니다.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1남 1녀의 자식까지 낳은 박연은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며 중국, 일본인으로 구성된 외인부대를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하멜 - 박연의 통역과 하멜표류기


그런데 조선 효종 때인 1653년, 하멜과 36명의 서양인이 제주도에서 붙잡히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나중에 하멜표류기를 쓰게 될 하멜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원이었습니다. 이들은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조난을 당해서 난파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20대인 하멜과 박연의 나이차는 약 30년 정도였습니다. 최근에 하멜이 조선에 온 적이 없다는 주장도 나오곤 하지만, 하멜표류기가 유럽에 조선을 알린 문헌적 가치는 충분합니다. 


사진: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항구. 이곳에도 동인도회사가 있어서 네덜란드와의 교역이 활발하였다. 일본은 조총 등 유럽 문물을 많이 받아들였다. [하멜 - 박연의 통역과 하멜표류기](사진: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항구. 이곳에도 동인도회사가 있어서 네덜란드와의 교역이 활발하였다. 일본은 조총 등 유럽 문물을 많이 받아들였다. [하멜 - 박연의 통역과 하멜표류기] / ⓒ www7a.biglobe.ne.jp/~gakusyuu)


효종 시대의 조선은 하멜과 일행을 중국이나 일본으로 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강제 억류'가 된 것입니다. 이미 네덜란드인 박연이 훈련도감에서 '홍이포' 같은 화포기술로 활약을 하고 있었기에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 

더구나 효종은 표면상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필요성은 분명했습니다. 하멜표류기를 쓸 정도라면 글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들 일행 중에는 대포, 조총, 천문학 기술자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사진: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하멜의 동상. 하멜표류기는 유럽에 조선을 알리는데 중요한 문헌이 되었다. 이 동상도 왼쪽 팔에 책을 끼고 있다. [하멜 - 박연의 통역과 하멜표류기](사진: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하멜의 동상. 하멜표류기는 유럽에 조선을 알리는데 중요한 문헌이 되었다. 이 동상도 왼쪽 팔에 책을 끼고 있다. [하멜 - 박연의 통역과 하멜표류기] / ⓒ Wikifrits)


조선은 유럽인들이 남쪽의 동남아시아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유럽에 무지했습니다. 일본인이 알려주어서 유럽에 네덜란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정도입니다. 그때서야 남만인이라고만 부르던 박연이 네덜란드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과의 통역을 위해 박연이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박연이 26년이나 조선에 살며 고국어에 서툴러진 탓에 대화가 힘들었습니다. 하멜표류기에는 그로인해 놀라게 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래도 벨테브레(박연)는 그날 숙소로 돌아와 잊었던 고국을 그리워하며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하멜과 박연의 훈련도감 


처음 이들은 맞은 '제주목사'는 물건도 되찾아 주고 잔치도 열어주며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바뀌고 대우가 나빠지면서 하멜 일행은 탈출을 시도했고, 붙잡혀서 곤장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하멜표류기에 부정적으로 쓰여 있습니다. 

결국 하멜과 일행은 한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한양에서 하멜은 박연과 함께 훈련도감에 소속되었으며, 포수로 일했습니다. 이것은 효종이 북벌을 준비하며 이들의 기술을 써먹기 위함입니다. 이후 약 3년 동안 박연과 하멜은 함께 하게 됩니다. 


사진: 제주도에 있는 하멜표류기 기념 장소. 한국광관공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다. 하멜에 대한 기념장소는 박연에 대한 자료보다 많다. [하멜과 박연의 훈련도감](사진: 제주도에 있는 하멜표류기 기념 장소. 한국광관공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다. 하멜에 대한 기념장소는 박연에 대한 자료보다 많다. [하멜과 박연의 훈련도감] / ⓒ 한국관광공사)


하지만 일대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일행 중 두 명이 청나라 사신의 앞길을 막고 조국으로 보내달라고 사건을 벌인 것입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군비확장을 감시하던 청나라를 피해서 호시탐탐 군사력 증강을 노리던 효종에게는 큰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일로 인해 하멜 일행은 처형 위기까지 몰렸지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결국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박연은 하멜에게 "조선에서는 떠날 수가 없으니 아예 기대를 말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하멜표류기에 나옵니다. 


사진: 조선의 17세기 모습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가 된 하멜표류기. 원래는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하여 작성된 보고서이지만, 나중에 책으로 발간되어 유럽인들에게 정보를 전해주었다. [하멜과 박연의 훈련도감](사진: 조선의 17세기 모습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가 된 하멜표류기. 원래는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하여 작성된 보고서이지만, 나중에 책으로 발간되어 유럽인들에게 정보를 전해주었다. [하멜과 박연의 훈련도감] / ⓒ koreasea.net)


이 일로 인해 하멜은 훈련도감에서 쫓겨나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떠났고, 박연과도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조선 귀화를 선택한 박연과 달리 하멜 일행은 강제 억류였으니 어떠하든 탈출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멜표류기에 그려진 것처럼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표류"된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조선도 알고 있었기에 이들은 세 군데로 나뉘어 수용되어 7년을 지냈습니다. 관리 감독자를 잘못 만나면 구걸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할 정도로 고생을 하기도 했습니다. 





박연과 하멜표류기의 그후


하멜 등이 조선에 억류된 지 13년이 되는 해, 다시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하멜 등 8명의 네덜란드인들은 거짓말로 배를 빌려서 일본으로 도망갔습니다. 나중에 남은 8명도 송환되어 소원대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하멜의 나이는 50대가 되었으며 박연은 훈련도감을 그만 두고 70대의 고령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멜표류기의 마지막 해인 이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36명 중 16명밖에 안 되었습니다. 박연과 하멜은 네덜란드인으로 조선에 와서 한쪽은 귀화하고 한쪽은 떠났습니다. 


사진: KBS 방송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의 박연. 훈련도감 복장을 하고 있는데, 이 다큐멘터리의 촬영을 위해서 네덜란드 대사가 직접 연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연과 하멜표류기의 그후](사진: KBS 방송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의 박연. 훈련도감 복장을 하고 있는데, 이 다큐멘터리의 촬영을 위해서 네덜란드 대사가 직접 연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연과 하멜표류기의 그후] / ⓒ KBS)


한편 박연은 여생을 보낸 후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젊은 시절 박연은 훈련도감에서 일본인 투항자와 중국인 표류자로 구성된 외인부대의 지휘를 맡아 활약했었습니다. 그래서 자식도 훈련도감에 들어갔다는 말이 있으나, 박연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아서 찾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박연은 네덜란드에도 처와 자식이 있었기에 1990년대에 박연의 네덜란드 13대 후손이 한국에 왔었지만 찾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원산 박씨가 박연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KBS 방송의 다큐멘터리에서의 하멜. 하멜표류기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하멜을 통역하기 위해 활동한 박연과의 사연도 함께 방송되었었다. [박연과 하멜표류기의 그후](사진: KBS 방송의 다큐멘터리에서의 하멜. 하멜표류기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하멜을 통역하기 위해 활동한 박연과의 사연도 함께 방송되었었다. [박연과 하멜표류기의 그후] / ⓒ KBS)


하멜은 네덜란드로 돌아가서 그 유명한 하멜표류기를 썼습니다. 사실 이것은 "하멜보고서"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억류되어 있는 동안 못 받은 임금을 받기 위해서 작성된 보고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책으로 출판되어 많이 팔리면서 17세기 조선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책이 되었습니다. 다만, 조선인들이 단순하면서도 도둑질과 거짓말을 잘하고, 유약한 민족이라는 부정적인 면이 많다는 문제점은 있습니다. 그 고생을 했으니 하멜 입장에서는 좋게 쓸 수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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