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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최후 - 이방원의 왕자의 난과 정도전의 죽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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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최후 - 이방원의 왕자의 난과 정도전의 죽음

키스세븐지식 2016. 3. 13.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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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최후 - 이방원의 왕자의 난과 정도전의 죽음]  





조선 건국의 절대적인 인물 정도전의 최후는 처참했습니다. 정도전은 비명의 죽음을 맞게 되고, 그 후 수백 년 동안 나쁜 평가 속에 있었습니다. 한 국가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조선이 수백 년간 지속될 통치체계를 만들었지만 정도전의 죽음은 묘도 남아있지 못할 정도의 최후였습니다. 정도전은 이방원의 왕자의 난에 의해 최후를 맞은 후 무려 500년을 간신으로 치부 당했던 것입니다.






왕자의 난 이전의 정도전과 이방원


정도전과 이성계는 친구같은 군신관계였습니다. 이성계를 왕위에 올려준 인물이 정도전이지만, 조선건국 이후 정치, 경제, 체제, 사상, 국방, 심지어 외교에까지도 정도전의 능력 덕분에 이성계는 500년 조선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건국 이후 정도전은 적을 많이 두게 되었고, 그 내면에는 권력투쟁이라는 현실이 정도전의 죽음을 불러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나라를 세웠지만 자기 마음대로 국가를 주무를 수 없었던 왕족의 불만과, 이상적인 성리학 국가를 세우려던 정도전의 고집이 충돌하여 정도전의 최후를 불러온 것입니다.



(정도전의 최후 - 정도전과 태조 이방원을 그린 그림)


더구나 정도전은 옳다 싶으면 밀어붙이는 성격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떠나가게 했습니다. 학문적 스승인 이색을 죽으라고 외딴섬에 귀양 보내고, 친한 친구 정몽주와는 원수가 되었으며, 같이 공부한 이숭인을 살해했습니다. 정도전의 죽음이 비참했던 것은 과격한 강경노선으로 적을 많이 둔 이유도 있습니다.

정도전이 꿈꿨던 이상적인 나라는 성리학적인 나라였기에 임금이라도 법도에 따라야 하며, 신진사대부가 정치를 담당하는 구조였습니다. 하지만 야욕이 강했던 이방원이 보기에는 이성계에게 붙어서 왕권약화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정도전이 정치권과 병권 등 최고 권력을 모두 손에 쥔 채, 강경노선만 걸으니 이방원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원이 정도전의 최후를 계획하는 수순에 다다릅니다.



(조선 왕조의 새 왕궁 경복궁)






정도전의 죽음, 정도전의 비참한 최후의 원인


정고전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충돌들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방원의 이복동생인 방석을 세자로 세우면서 정도전이 미움을 받기도 하는데, 이 부분은 이성계의 고집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정도전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물론 왕이 될 확률이 점점 더 멀어지는 이방원의 눈에는 보일리 없었을 사실입니다.

어찌 보면 만약 이성계의 첫째 아들인 이방우가 후계자를 거부하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방원의 욕심을 누르는 방법은 그것이 유일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방우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자 강원고 철원에 숨어살았고, 나중에 함흥에 자리 잡았지만 1년 만에 술병으로 죽었습니다. 마음이 따뜻하고 형제와 우애가 깊었던 사람이 술에 빠져 살다가 갑자기 죽었으니, 사람들은 고려의 충신으로 아버지의 반란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그리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과 정도전의 죽음 /출처: 방송캡처)


그리고, 사병혁파 추진 또한 정도전의 죽음을 부르는 결정적인 이유가 됩니다. 고려말 왕권을 약화시키는 사병제도가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고, 반역을 통해 자기들이 집권하였으므로 정도전에게는 사병혁파가 당연히 위험을 제거하기 위한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방원에게는 정도전이 자신을 목표로 사병혁파를 하는 것이라고 보였습니다. 정몽주를 죽이는 등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공신 명단에서 빠진 이방원에게는 모든 것이 불만스러웠을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아들들을 변방으로 보내어 국방을 지키게 하자고 건의를 한 것은, 정치적으로 이방원이 양 날개를 꺾이게 되는 것이므로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무인정사", 즉 1차 왕자의 난이고 그 결과가 정도전의 죽음입니다. 



(실록에는 정도전의 죽음이 매우 비굴하게 나와 있다)






정도전의 최후, 죽음과 이후의 평가


이방원은 사병을 이끌고 이성계가 있던 궁궐을 접수했습니다. 그 시간, 남은 등과 술을 마시던 중에 공격을 받고 정도전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후 이방원의 이복형제인 이방번과 이방석도 살해되었습니다. 기록상으로는 정도전이 이성계의 병을 핑계로, 이방원 등의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죽일 음모를 했다고 합니다. 이방원이 이를 파악하고 반격했다고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지라 이방원이 애초에 치밀한 쿠데타를 꾸몄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궁궐을 접수할 때 궁을 지키던 가별초 병력과의 큰 전투 없이 입성하였다는 것은, 이성계의 사병이었던 가별초를 미리 포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입니다. 궁 입성 때 수비대장인 박위만 살해 당했습니다.

또, 기록에 의하면 정도전이 죽음 직전에 살기 위해서 이방원에게 비굴하게 빌다가 목이 잘렸다고도 합니다. 이 역시 이방원 측의 역사 왜곡이 아니냐는 의견이 중론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정도전과 이방원의 조선 건국 /출처: 방송 캡처)


정도전의 죽음을 막고자 뛰어들었던 두 아들도 역시 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도전의 죽음의 죄명은 역적이 아니라 간신질과 왕가를 음해한 것이었으므로 삼족을 멸하는 화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큰 아들과 다른 가족들은 살아남았고 얼마 후 모두 신분이 복권되었습니다. 정도전의 죽음 얼마 후 큰아들은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됩니다. 나중에 큰아들은 형조판서에 까지 올랐으며, 손자는 영의정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도전은 죽음 이후 고종 때까지 신분이 복권되지 못했습니다. 500년 간 조선의 사대부들은 정도전을 간신이라 여겼습니다. 이방원의 후예들이 왕을 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교 성리학의 관점에서 임금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킨 잘못이 더 크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정도전이 이성계의 몫까지 다 짊어진 셈입니다. 반면 정몽주는 이방원이 왕에 오르자 오히려 고려의 충신으로 복권되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초기의 정도전에 대한 냉혹한 간신 폄하와 달리 비록 조선 중기 이후에는 어느 정도 그 공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었으나, 공식적으로는 500년 동안 간신으로 여겨진 것이 정도전입니다. 정도전의 죽음 후, 시신과 묘도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여 현재 정도전의 실제 묘는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얼마 전 정도전의 묘로 추정되는 목 잘린 시신의 묘를 발견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확정이 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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