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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십자군 이야기 - 군중 십자군, 소년 십자군, 알비 십자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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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십자군 이야기 - 군중 십자군, 소년 십자군, 알비 십자군

키스세븐지식 2015. 12. 16.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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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십자군 이야기 - 군중 십자군, 소년 십자군, 알비 십자군]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의 성지를 해방시키려는 명분으로 유럽 카톨릭 기사들이 이스라엘의 예수살렘을 공격한 전쟁입니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진행되었는데, 8차에 걸쳐 공격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정식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십자군 전쟁이 몇 차례 더 있었습니다. 조금 황당하기도 한 십자군들은 군중십자군, 소년십자군, 알비십자군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 십자군은 정말 대책이 없는 군대 아닌 군대였습니다. 적이 어디있는지도, 어디를 공격해야 하는지도, 어떻게 공격할 건지도 모르고 무작정 떠났던 십자군들을 소개합니다. 





예루살렘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군중십자군 


실제 십자군은 11세기 말에 1차 원정을 시작하지만 그 보다 이전에 군중들이 자기들 멋대로 출발한 것을 군중십자군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농민들과 하층기사, 일반인들이었는데, 심지어 무기도 없이 무작정 참여한 사람과 여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군중십자군은 군대가 아니라 순례운동단체에 가까웠습니다. 

앞서 1095년 로마교황인 우르바누스 2세는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는데, 그 영향이 엄청났습니다. 이 연설에 감동받은 자들이 모여서 예루살렘을 공격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군중집자군입니다. 



(군중십자군은 십자군사의 뒷면에 있던 황당한 십자군운동이었다)


더구나 피에르라는 사람이 십자군을 일으켜야한다는 주장을 퍼트리고 다니는 바람에 군중십자군은 그 수가 4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 외에도 고티에 생자부아 등의 인물들이 또 다른 십자군을 모아서 동로마제국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군중십자군의 목적은 이슬람의 공격을 받고 있는 동로마를 구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군중십자군은 정식군대가 아니니 지휘체계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유태인을 발견하면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며 학살을 자행했고, 헝가리와 동로마영토에서는 행패를 부리다가 같은 편인 헝가리, 동로마제국 군대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헝가리인 4천명이 학살 당하고, 군중십자군 1만 명이 죽습니다. 


약간 과장된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예루살렘이 어디있는지도 몰랐을 정도라고 하니, 동로마제국의 황제는 할 수 없이 군중십자군을 중동까지 안내해 주었습니다. 도와주러 왔다면서 오히려 난동을 부리는 골칫덩어리였으니 빨리 보내 주는 게 나았습니다. 

당시 소아시아에 있던 이슬람국은 셀주크 왕조였습니다. 물론 셀주크의 정규군에게 군중십자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각종 유인작전과 매복 등에 당하며 군중십자군은 완전히 궤멸 당했으며, 포로로 잡힌 자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학살 당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끌려갔고, 군중십자군 중 제대로 돌아 온 자는 겨우 3천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군중십자군은 정규 군대가 아닌 일반인과 일부 기사들이 통제없이 출발한 십자군이다)






십대들이 십자군원정을 떠나다 - 소년십자군 


십자군 원정이 이미 4차까지 진행된 후 13세기 초에 갑자기 비공식 십자군이 모이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들을 일명 소년십자군이라고 부릅니다. 

어느 날 프랑스 북부에 살던 에티엔이라는 양치기 소년이 왕에게 편지를 전하겠다고 먼 길을 떠납니다. 신이 성지를 회복하라는 개시를 주었다는 편지였습니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수많은 소년 소녀가 에티에를 따라 나섰습니다. 대부분 10대의 청소년들이었는데, 부모 몰래 도망쳐 나온 아이들부터 길거리의 고아들까지 종류도 다양했고 그 수도 3만 명에 가까웠습니다. 

왕은 시큰둥했지만 소년십자군은 기어코 배를 구해서 원정을 떠났습니다. 



(소년십자군이 배를 빌려타고 떠나는 모습을 그린 그림)


그런데, 배를 빌려준 선주는 사악한 인물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버릴 심산으로 배를 태워준 것입니다. 항해를 하던 중 2척의 배는 좌초해 버리고 5척은 아프리카로 가서 소년십자군들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당시 북부아프리카는 이슬람의 영향권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노예로 사온 이슬람인들은 소년십자군이 나쁜 어른에 의해 사기 당해서 팔려 온 사실을 알게 되었고, 불쌍히 여겨서 풀어 주기도 했습니다. 

마침 적대적이었던 로마 교황과 이슬람 술탄의 화해모드가 잠간 생기면서, 일부 아이들은 본국으로 돌아올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간 소년십자군은 겨우 700여명이었다고 합니다. 



(이슬람의 배려가 없었다면 소년십자군 전원이 아프리카의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최초의 종교재판이 된 알비십자군 


군중십자군과 소년십자군이 황당한 십자군이었다면, 알비십자군은 정치적이고 악랄한 십자군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13세기 초에 프랑스 남부에서 카타리라는 신흥종교가 생기면서 발생합니다. 알비라는 지방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카타리파는, 북부 프랑스 귀족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남부 귀족이 동조하면서 영향력이 계속 커져갔습니다. 로마입장에서는 정식 카톨릭이 아닌 종교가 사세를 확장하니 견제를 하려고 했고, 협상을 하러 갔던 사신을 카타리파가 죽이면서 카타리파를 멸족하라는 요청이 떨어집니다. 

이로써 성지회복이 아닌 크리스트교 내부에서의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는데, 이것이 알비십자군이었습니다. 



(성의 모든 주민을 알몸으로 쫓아내는 알비십자군의 만행을 그린 그림)


사실 12세기 이전까지는 이단이라고 불릴만한 큰 사건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알비십자군이 벌인 전쟁은 최초의 이단 종교재판에 해당합니다. 이후로 유럽은 이단을 잡아 죽이는 풍토가 횡횡하게 됩니다. 

처음의 공격은 교황의 직접 요청에 따라 남부지역을 토벌해 나갔습니다. 그 중 알비십자군의 가장 유명한 전투가 카르카손이며 그 장면이 명화로 남아 오늘날에도 전해집니다. 이 성의 시민들은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항복하였는데, 죽이지 않는 대신 남녀를 부문하고 알몸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나중에는 프랑스 국왕이 직접 지휘하는 알비십자군이 운영되었고 계속된 전투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산 채로 불에 던져져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같은 나라 국민들이지만 종교전쟁으로 끔찍한 학살을 자행한 알비십자군)


겉으로는 종교탄압의 형태이고, 속으로는 북부와 남부 간의 정치적 싸움이었던 알비십자군 토벌작전은 카타리파를 믿는 일반 시민들이 학살 당하게 만들었습니다. 

시민 중 카톨릭 신자와 카타리파 신자가 섞여 있어서 구분이 어렵자, 알비십자군은 모두 다 죽여 버리기로 했습니다. 카톨릭 신자라면 죽어서 천국에 갈 것이니 문제없다는 게 알비십자군의 생각이었습니다. 

전쟁 말기가 되자, 프랑스왕은 남부에서 가장 힘이 강한 레몽 7세 백작에게 항복협정을 맺으면 백작지위를 보장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를 믿고 협정을 맺었지만, 프랑스왕은 레몽 7세를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이 사기 협정을 통해 남부 카타리파는 힘을 잃었고 차례차례 정복 당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점령 당한 남부는 종교재판이 계속 열렸고 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학살을 당했습니다. 약 20년간의 알비십자군 토벌전쟁을 통해 100만 명이 학살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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