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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2) - 독일과 소련의 비극적 2차대전 독소전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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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2) - 독일과 소련의 비극적 2차대전 독소전쟁

키스세븐지식 2015. 8. 9.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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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2) - 독일과 소련의 비극적 2차대전 독소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동부전선에는 고집불통의 두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둘 다 병사의 생명을 소모품이라 생각했기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2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들은 히틀러와 스탈린입니다.

특히 스탈린은 인해전술식의 전투를 치렀는데, 스탈린그라드에서 죽어 간 소련의 젊은이들은 조국을 지킨 병사면서 동시에 권력자의 소모품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전쟁의 본질입니다.





소련의 포위작전에 걸려든 독일 6군 


거의 패배를 모르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고전을 한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독일군의 장점은 이른바 전격전이라고 불리는 전술인데, 전차 등의 기갑부대와 공군력의 지원을 보병이 적극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탈린그라드의 소련군은 폐허가 된 건물 속에 있어서 탱크를 활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게릴라전 방식이 근접전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공군의 지원도 어려웠습니다. 서로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싸웠다고 합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후반의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투 / 키스세븐 자체제작)


3개월 동안 독일과 루마니아 등 추축국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스탈린그라드의 소련군을 볼가강까지 몰아붙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자 소련군 수뇌부는 병력만 계속 투입해서는 해결이 안 날 것이라 판단하고 새로운 작전을 펴기로 하였습니다. 이미 시 내에 진입한 독일군은 놔두고 시 외곽의 추축군을 공격하기로 한 것입니다. 독일의 주력은 스탈린그라드 시 내에 있지만, 좌우의 주변부는 전투력이 약한 루마니아군이 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련군은 양쪽으로 주변 부대를 공격하며 전진하여 스탈린그라드를 에워싸서 만났습니다. 스탈린그라드 내의 독일 제6군은 포위되고 만 것입니다. 독일 6군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부대였습니다. 적어도 30만 명에 가까운 독일 6군 및 추축군이 소련의 허를 찌른 포위망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6군의 대장은 즉각 탈출의견을 올렸고, 지휘부 중에는 6군의 탈출 작전을 건의하는 참모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는 절대 스탈린그라드 시에서 나오지 말고 버티라고 명령했습니다.



(소련의 포위작전은 시작되고 독일은 허풍쟁이 독일공군 때문에 덜미를 잡힌다)






히틀러의 오판과 스탈린의 인해전술 


보급로는 끊겼지만 히틀러는 독일 공군에게 비행기로 공중보급을 할 수 있겠냐고 물었는데, 공군 지휘부는 가능하다고 큰 소리를 치며 스탈린그라드 사수를 부추겼습니다. 결국 끝까지의 항전으로 결정 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독일 공군의 수송능력은 필요 물자의 60%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기상악화와 소련의 방해로 실제로는 10%의 물자 밖에 보내 주지 못했고, 심지어 겨울에 여름군복을 보내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스탈린은 병사와 국민의 목숨을 도구로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30만 명에 가까운 대규모의 정예부대였지만 보급이 끊긴 것은 치명적이었습니다. 독일이 자랑하는 규모의 6군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식량도 탄약도 연료도 고갈되어 자력으로 탈출하는 것마저 불가능해졌습니다.

소련군의 포위는 계속 좁혀져 오는데, 병사는 계속 죽어가고 나치지도부의 결정 때문에 버텨야만 하는 지경입니다. 아까운 청춘들이 죽음으로 나버려졌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러시아의 추위가 아니라 지도부의 판단 잘못 때문에 생긴 비극입니다.



(탄약이 떨어지고 추위와 배고픔 속에 굶어 죽어갔던 독일 병사들 / 출처: telegraph.co.uk)


앞서 독일군은 소련군 포로를 잡으면 잔혹하게 대했습니다. 그래서 소련군에게 잡히면 자신들도 어찔 될 것인지를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들은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 역시 결사항전을 선택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시체를 파먹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참혹한 현실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역경 속에서도 독일군의 군율은 잘 지켜졌고 대장의 명령 없이 항복하는 독일군은 드물었다고 합니다. 정신력으로 버텨가는 스탈린그라드의 하루하루가 계속 되었습니다.



(잿더미로 변한 스탈린그라드 도시에 덩그러니 남은 놀이터 석상들)





30여 만명 중 5천 명만 살아돌아온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6월 말에 시작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1월까지 소련의 위기가 계속 되다가, 독일군이 포위되면서 1943년 2월까지 최악의 전투가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독일군은 전투력을 상실한 채 3개월 가까운 포위에서 항복을 하게 됩니다. 중소도시 인구 규모의 대부대에서 항복 때까지 살아남은 병사는 겨우 9만 여명에 불과했고 1만 명 정도는 그래도 끝까지 싸우다가 죽어갔습니다.

피골이 바짝 마른체로 살아남은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 병사들도 수용소 생활 중에 전염병 등으로 죽어갔고, 전후에 살아서 독일에 돌아 온 병사들은 겨우 5천여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시체가 너무 많아 묻기조차 힘든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승리한 소련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의 공식 전사자 20만 명을 포함한 40만 명을 비롯하여 루마니아군 20만 명, 기타 추축국 2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소련도 113만 명이 인간 소모전으로 죽어갔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이렇게 6개월 만에 200만 명의 젊은 청춘들이 죽어간 비극입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소련의 승리로 막을 내렸고, 그 덕분에 절대강자로만 알았던 독일군은 도미노처럼 쓰러지며 독일 패망으로 가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재건되어 볼고그라드로 이름을 바꾼 구.스탈린그라드 / 출처: wikimedia.org)


이후 독일은 소련의 대반격에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까지 당하면서 1945년 5월에 연합군에 항복하였습니다.

소련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참혹한 인명 손실로 인해 비극일 뿐인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인류 전투 사상 최악의 전투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독일과 서방국가보다는 소련과의 관계가 더 적대적이었던 이유는 이처럼 초대규모의 인명 피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항복에서도 독일은 소련이 아니라 유럽서방국가에게 항복하려고 노력을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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