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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베르사유 궁전이 지어진 이유 - 니콜라 푸케, 프롱드의 난, 루이 14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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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베르사유 궁전이 지어진 이유 - 니콜라 푸케, 프롱드의 난, 루이 14세

키스세븐지식 2019. 1. 6.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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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베르사유 궁전이 지어진 이유 - 니콜라 푸케, 프롱드의 난, 루이 14세]

프랑스를 대표하는 궁전, 매우 큰 규모와 아름답기로 유명한 궁전, 그러나 실제 왕궁으로 사용된 것은 얼마 안 되는 궁전... 파리 베르사유 궁전이 지어진 이유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태양왕 루이 14세의 절대왕권을 상징하는 베르사유 궁전과 니콜라 푸케, 프롱드의 난 등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파리 베르사유 궁전은 어떤 곳?

먼저, 간단히 유럽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면 파리 '베르사유 궁전'이 지어진 이유를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서 정리합니다. 스페인, 포르투갈이 주도하는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후, 1558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대가 열리면서 영국이 최강국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100년 후, 이번에는 프랑스가 강력해지는데, 거기에는 태양왕 '루이 14세'가 있었습니다.

사진: 태양왕으로 불리는 루이 14세의 초상화. 프랑스 최강의 왕권이었다(태양왕으로 불리는 루이 14세의 초상화. 프랑스 최강의 왕권이었다 [베르사유 궁전 니콜라 푸케 루이14세] / ⓒ 야셍트 리고)


1680년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1682년 프랑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지은 이유는 "절대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고, 1689년 영국 '권리장전'이 정해진 이유는 "의회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다시 100년 후, 프랑스 왕권이 '시민혁명'으로 몰락하는 길목이며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승승장구하는 길목이기도 합니다.

사진: 베르사유궁전의 정면 모습. 화려한 바로크 양식(베르사유궁전의 정면 모습. 화려한 바로크 양식 [니콜라 푸케 베르사유 궁전 루이14세 프롱드의 난] / ⓒ AdamKinnwall)


파리 베르사유 궁전은 사실 파리에 있지 않습니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지으면서 베르사유라는 도시가 생겨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궁전은 한 번에 2만 명이 들어갈 수 있고 2.5km나 되는 정원에 왕궁과 두 개의 작은 궁이 있습니다. 왕궁에는 무려 73m나 되는 "거울의 방"과 "전쟁의 방", "평화의 방" 등의 수많은 방이 있으며 화려한 장식으로 유명합니다. 베르사유는 규모가 너무 커서 성당을 따로 짓고 마을도 있을 정도입니다.

사진: 유럽 3대 궁전으로 꼽히는 베르사유궁전의 내부 치장(유럽 3대 궁전으로 꼽히는 베르사유궁전의 내부 치장 [베르사유 궁전 니콜라 푸케 루이14세] / ⓒ yashamaru)


베르사유 궁전을 지을 당시 무려 3만 명 이상의 인부와 6만 마리 이상의 말이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도 24년이나 걸려서 완성되었는데, 궁 안에는 300m나 되는 복도가 있고 수많은 방들이 있어서 귀족들은 아무 방이나 들어가서 사랑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주변에는 1500개나 되는 물줄기를 내뿜는 분수가 있고, 1650m와 1070m의 두 개의 운하가 십자가 모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지금은 박물관 겸 미술관으로 운영되며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이 지어진 이유 - 니콜라 푸케

아무리 최강 권력의 태양왕 루이 14세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베르사유 궁전을 지은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지게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절대왕권이 핵심이지만 베르사유 궁전과 '니콜라 푸케'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는 집들이 한 번 잘못했다가 무기수로 인생을 마친 사람입니다. 니콜라 푸케는 루이 14세 때 재무장관이었습니다. 그는 3년이나 공을 들여서 파리 인근에 성을 지었는데, 그곳이 푸케의 '보르비콩트'성입니다.

사진: 니콜라 푸케와 루이 14세가 표현된 영화 (니콜라 푸케와 루이 14세가 표현된 영화 "루이 14세의 권력쟁취" [니콜라 푸케 베르사유 궁전 루이14세 프롱드의 난] / ⓒ 로베르토 로셀리니)


베르사유 궁전의 모델이 된 푸케의 보르비콩트성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 조경가, 화가 등을 동원해서 만들었으며 큰 분수와 넓은 정원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1661년 니콜라 푸케는 루이 14세에게 잘 보이려고 성에 초대해서 극진한 대접을 했습니다. 6천 명이나 초대했으며, 발레를 공연하게 하고 최고의 요리사를 불러서 만찬을 준비했으며 루이 14세를 위해 특별히 장식된 방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그 방에 묵지 않았습니다.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입니다.

사진: 베르사유 궁전의 모델이 된 보르비콩트성 (니콜라 푸케의 성)의 모습(베르사유 궁전의 모델이 된 보르비콩트성 (니콜라 푸케의 성)의 모습 [베르사유 궁전 니콜라 푸케 루이14세] / ⓒ David Perbost)


루이 14세의 분노는 질투였습니다. "감히 왕보다도 화려하고 큰 궁전에 살다니!"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정성껏 왕을 대접한 뒤 니콜라 푸케는 체포되었습니다. 죄명은 "부정축재'였지만, 내용은 "괘씸죄"였습니다. 이미 부정축재의 소문이 있었기에 재판에서도 유죄를 받았는데, 루이 14세는 재판 결과가 마음에 안 든다며 무기징역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결국 니콜라 푸케는 감옥에서 삶을 마감했고 부인은 추방당했으며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다고 합니다.

사진: 베르사유궁전의 중앙부분을 찍은 항공사진(베르사유궁전의 중앙부분을 찍은 항공사진 [니콜라 푸케 베르사유 궁전 루이14세 프롱드의 난] / ⓒ Godot13)


이때 유명해진 사람이 또 있는데, 그가 바로 '달타냥'입니다.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 나오는 그 달타냥은 루이 14세의 명령을 받아 니콜라 푸케의 체포작전을 책임졌습니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짓도록 명령하며 보르비콩트성보다 뛰어난 성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니콜라 푸케의 부인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죽은 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서 보르비콩트성을 넘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집안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되고 맙니다.​ 



프롱드의 난 뜻과 베르사유 궁전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지은 이유로 니콜라 푸케의 보르비콩트성이 거론되는 것은 절대왕권이라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속셈은 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시작되는데, 그것은 '프롱드의 난'입니다. 프롱드 난의 뜻은 아이들이 돌을 던지기 위한 투석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당시 아이들이 정부기관에 항의의 뜻으로 돌을 던지곤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프롱드의 난은 왕권에 대항한 귀족들의 반란입니다.

사진: 루이14세 시대의 프롱드의 난을 표현한 그림(루이14세 시대의 프롱드의 난을 표현한 그림 [베르사유 궁전 니콜라 푸케 루이14세] / ⓒ Jean Hubac)


프롱드의 난의 뜻을 정치적으로 설명하자면 프랑스 최후의 귀족의 반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루이 14세는 다섯 살에 왕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두 번의 프롱드의 난을 겪었습니다. 귀족 고등법원과 30년 전쟁의 영웅 '콩데' 공이 왕권에 대항해서 일으킨 프롱드의 난 때문에 어린 왕은 파리에서 도망가서 피신해야 했습니다. 이런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루이 14세는 니콜라 푸케처럼 왕보다 화려한 자를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사진: 거대 규모와 화려한 내부장식으로 유명한 거울의 방 내부(거대 규모와 화려한 내부장식으로 유명한 거울의 방 내부 [니콜라 푸케 베르사유 궁전 루이14세 프롱드의 난] / ⓒ Myrabella)


사실 베르사유 궁전은 아버지 루이 13세의 사냥터 별장이었습니다. 프롱드의 난과 니콜라 푸케의 자극으로 인해 1665년까지 확장공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후 1677년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정식 왕궁으로 결정하면서 1710년까지 계속된 증축공사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프랑스의 수도 이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와 함께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지방이 귀족들은 베르사유 궁전으로 올라와서 살아야 했습니다. 대신 루이 14세는 사치와 향락적인 생활을 제공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궁전 영내에 따로 지은 성당의 내부 모습(궁전 영내에 따로 지은 성당의 내부 모습 [베르사유 궁전 니콜라 푸케 루이14세] / ⓒ iankelsall1)


태양왕 루이 14세의 강력한 왕권에 잘 보여야만 권세를 얻을 수 있으므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사는 것을 귀족이 거부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방 귀족이 항상 왕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지방 권력의 약화를 의미합니다. 먹이를 주는 대신 길들여지는 애완동물처럼 귀족들은 루이 14세의 영향력 아래에서 지냈고, 문란한 생활 속에서 점점 대항할 힘을 잃어갔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이 지어진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고통 속에서 이 거대한 건축물을 지어야 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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